코드 리뷰는 난도질이다.
경영학원론의 추억
경영학을 전공했고 1학년 전공 필수 과목인 경영학원론이 굉장히 유명한 학교를 다녔다.
당시 원론을 듣는 학생이라면 대부분 에세이를 작성해야 했는데 월요일에 에세이를 제출하면 교수님이 모두 평가하고 기준에 맞지 않으면 1주일 이내에 다시 제출해야 했다.
다시 제출해도 기준에 맞지 않으면 계속 다시 제출해야 하고, 에세이 반려 사유에 대해서는 자세히 말씀하시진 않았다. 대부분 보통 현저히 떨어짐, 오타 등 이런 단어로 답글을 다셨던 거 같다. 이렇게 반려된 에세이는 왜 에세이가 통과되지 않았는지 분석 보고서를 24시간 이내 제출하고 다시 에세이를 수정해서 제출해야 한다.
에세이 제출이 1주일, 5번 이내에 통과되지 않으면 해당 에세이는 무효 처리가 된다. 또한 에세이를 왜 제대로 작성하지 못했는지에 대한 보고서를 따로 제출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그 다음주 에세이는 동시에 작성해야 한다. (…)
이런 하드한 에세이 수업 방식으로 굉장히 많은 신입생들이 드랍을 선택한다. 내가 수강했던 반만 해도 절반 정도가 살아 남았고 다른 반은 거의 60명 정원에 열 몇 명 정도 살아남았던 걸로 기억한다.
에세이가 통과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글로 설명하니 느낌이 안 올 수도 있는데 예를 하나 들어보면 이렇다.
그 당시 대부분 해당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일요일 23시부터 월요일 00:00 정각에 에세이를 원론 카페에 제출하려고 대기를 한다.(놀랍게도 실화다.) 00:00에 에세이를 제출하면 더 놀랍게도 교수님이 그 때부터 바로 에세이 통과 여부를 댓글로 작성해주신다.(지금 생각하면 교수님도 정말 대단하신 분이다.)
이 때 에세이 통과에 실패한 학생의 예를 보면 이렇다.
바로 에세이가 왜 통과되지 못했는지 분석 보고서를 24시간 이내 작성해야 한다. 해당 주차에 통과한 학생들의 에세이와 자신의 에세이를 비교하며 분석 보고서를 작성한다. (1,000자인가 글자 제한 수가 있던 걸로 기억한다.)
보통은 새벽에 보고서를 작성하기도 하고 일단 에세이 제출하고 바로 자기도 그 후에 작성하기도 한다.
분석 보고서를 작성하면 새롭게 에세이를 수정해서 제출할 수 있는 자격이 생긴 셈이다. 그 때부터 에세이를 수정한다. 에세이를 수정하고 제출하면 거의 대부분은 또 통과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에세이 통과 기준은 주차별로 다른데 주차가 높아질수록 점점 기준이 높아진다. 첫주차는 그래도 후하게 해주시는 편인데 그 이후부터는 (…)
그렇게 계속 통과하지 못할 경우 최악의 케이스는 5번 모두 통과하지 못해 5번의 실패 보고서와 6번의 에세이 작성 + 이번주 에세이 불통과 + 다음주 에세이 준비까지 일주일이 굉장히 고달퍼진다.
그 당시 소소한 이벤트가 많았는데 에세이 못 쓴 학생들을 위해서 교수님이 1주에 에세이 2개 제출권 이런 거를 가끔 이벤트로 뿌렸는데, 필요가 없는 학생은 필요한 학생에게 밥을 얻어 먹고 인증 사진과 함께 카페에 권한을 양도 받았다는 글을 작성하곤 했다. 지금 생각하니 나도 권한 얻으려고 노래방도 갔었던 거 같다.
에세이를 잘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경영학의 기본은 팀이다. 원론의 가장 특이한 점은 개강하기 전에 팀을 반드시 구성해 원론 카페에 팀 구성했다고 글을 써야 한다는 점이다. 극 I인 분들에게 쥐약과도 같은 수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일단 팀을 구하지 못하면 교수님이 카페에 구하지 못한 사람 명단을 올리고 명단의 사람들이 몇 주 안에 팀을 구성하지 못하면 자동 드랍된다.(F 처리) 악명 높은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여튼 그렇게 팀을 구성하면 팀으로써 해야할 일을 하게 된다. 원론 카페에는 10년 넘게 수많은 선배들이 작성한 에세이들이 있다. 검색하면 통과한 에세이와 통과되지 않은 에세이를 모두 확인할 수 있다.
팀은 각자 알아서 모이고 카페에 있는 통과한 에세이를 분석하고 작성해서 서로 에세이를 리뷰한다.
여기서 에세이를 리뷰하는 걸 “난도질”한다고 표현한다.(실제 했던 표현이다.)
에세이를 난도질하며 최대한 팀원의 에세이에서 부족한 점을 찾아낸다. 에세이의 난도질은 팀 전원이 하는게 기본이다. 5명이면 한 명의 에세이를 5명이 모두 확인해서 난도질한다.
보통은 5명이 네이버 카페를 하나 파서 제출 2-3일 전까지 에세이를 올리고 온라인으로 바로 난도질을 한다.
악명 높았던 이유가 갑자기 하나 더 떠올랐는데 팀원의 에세이가 5번 모두 통과되지 못할 경우 해당 팀은 그 주차에 모두 에세이를 통과시킨 팀에게 인터뷰를 요청해야 한다. 모두 성공시킨 팀은 어떻게 해서 리뷰를 했고 어떤 방식으로 공부했으며 실패한 팀원의 에세이를 분석해서 실패 원인을 알려준다.
(그래서 에세이 통과율이 낮은 학생들이 팀원들에게 미안해 해서 스스로 드랍을 선택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았다.)
요지는 팀원의 실패는 즉 팀의 실패라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경영학원론을 몸소 배우게 된다.
재밌는 건 에세이 10개를 모두 통과시키더라도 점수로 20점 정도일 뿐 이거 한다고 A+ 받는건 아니다. ㅎ.ㅎ
중간고사, 기말고사, 과제, 발표는 모두 따로라는 것 ^ㅁ^
이제 막 고3 끝나고 대학교 1학년이 된 학생들 대부분이 이 수업을 들으면 적응하지 못하고 쌍욕을 한다.
지금 생각하면 사회를 일찍 배울 수 있던 좋은 기회기도 했다.
이 때 원론 게시판에 글을 쓸 때도 교수님에게 어떻게 써야할 지 예절이라던가 메일 보낼 때라던가, 다른 팀에게는 어떻게 인터뷰를 요청 할지 팀원과의 커뮤니케이션은 어떻게 해야 할 지, 성공적인 팀은 어떤 팀인지 등등 굉장히 많은 걸 배웠다.
코드리뷰는 난도질과 같다
나는 이제 업무한지 3개월이 막 지났지만 최근에 팀원들의 코드를 리뷰하게 됐다.
리뷰를 하면서 느낀 점은 정말 딱 그거였다.
코드 리뷰라는 건 에세이 난도질하는 거와 같구나!!
다행히 경험이 있어서 그런가 최대한 꼼꼼히 보려는 습관은 있긴 하지만 아직 기술적인 이해도가 낮아 사수님들의 코드를 완벽히 리뷰하지 못해서 아쉽긴 한다. 이 부분 때문에 아마 최근에 내 평가가 너무 꼼꼼하게 보려 한다는 얘기가 있던 것 같기도 하다. 아직 남의 코드 보는데 익숙하지가 않다. 이것도 정말 많이 보다 보면 익숙해질텐데. 에세이 난도질 할 때도 밥 먹듯이 3개월 정도 보니까 나아졌었다. 이건 코드니까 아무래도 더 걸리겠지.(심지어 매일 보는게 아니어서 좀 아쉽다)(그리고 난 제대로 안봤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꼼꼼하다고요?!)
인생은 참 이상하다. 멀리 보지 못하고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예전에 누군가가 나를 위해 준비했던 안배 같이 과거의 경험이 불쑥 떠오르기도 한다. 대학교를 졸업한 후 가장 많이 생각나는 수업이기도 하다.
벌써 라떼는~ 하는 나이가 되버렸다는게 신기하기도 하고. 졸업한 선배들이 와서 그래도 원론 수업 잘 들어 놓으세요~! 사회 나가기 전 기초가 될 거니까! 했던 거에 툴툴 거리기도 했는데 말이다.
코드 리뷰를 더 많이 하고 싶다.
다른 에세이를 보면서 분석하고, 내 에세이를 쓰고, 팀원의 에세이를 난도질하고, 난도질 당한 내 에세이를 고치면서 매 주차 별로 에세이 실력을 올려 통과했던 것처럼.
더 좋은 코드를 끊임 없이 분석하고, 더 많은 코드를 보고, 내 코드를 수정하면서 그렇게 내 실력도 성장할 것이 분명함을 안다.
(여담이지만 나는 원론 초수강생으로 A+을 받았다^ㅁ^//)